보홀(Bohol)은 필리핀에서도 약간 늦게 알려진 섬이에요. 세부와 같은 비사야 지방에 속해 있으면서, 세부에서 페리로 두 시간이면 닿는 가까운 섬인데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세부가 도시화된 휴양지라면 보홀은 자연·동물·시골 풍경이 주인공이에요. 저는 두 곳을 한 번에 묶어서 갔는데, 세부에서 도착한 첫날 보홀의 공기를 맡고 "이 섬이 본편이고 세부가 환승이었구나" 하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보홀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첫째, 마닐라나 세부에서 보홀의 탁빌라란(Tagbilaran) 공항으로 국내선 1시간. 둘째, 세부 본섬에서 페리로 탁빌라란 항구까지 2시간. 페리는 오션젯(OceanJet)이 가장 안정적이고, 편도 800~1,200페소(약 1만 8천~2만 7천 원). 저는 페리를 추천해요. 비행기보다 저렴하고, 바다 위에서 보홀로 들어가는 풍경이 비행기 창에서 내려다보는 것보다 훨씬 직접적입니다.
대부분의 여행자가 묵는 곳은 탁빌라란이 아니라 그 옆에 다리로 연결된 작은 섬, 팡라오(Panglao)입니다. 알로나 비치(Alona Beach)가 팡라오의 중심 비치인데, 1.5km 길이의 흰 모래 해변에 식당과 다이브 숍이 늘어서 있어요. 보라카이만큼 정돈된 풍경은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람이 덜 붐비고 한 끼 600~1,200페소(약 1만 4천~2만 7천 원)면 신선한 해산물 BBQ를 먹을 수 있습니다. 저는 알로나 비치 끝쪽의 작은 가게에서 그릴드 람보(랍스터 사촌격) 한 마리를 시켰는데, 가격이 한국에서 같은 양 먹는 것의 1/4이었어요.
보홀의 진짜 시그니처는 초콜릿 힐(Chocolate Hills)이에요. 카르멘(Carmen) 지역에 1,200개가 넘는 원뿔형 언덕이 들판에 흩어져 있는 풍경인데, 5~6월 건기 끝물이 되면 풀이 말라서 언덕이 진짜로 초콜릿색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초콜릿 힐"이에요. 우기엔 초록색 언덕이라 사진의 인상과는 다르지만, 그것대로 또 매력이 있어요. 탁빌라란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전망대(Chocolate Hills Complex) 입장료 100페소. 트라이시클이나 투어 차량 대절이 일반적인데, 하루 풀투어로 묶으면 보통 1,500~2,500페소(차량 한 대 기준)에 초콜릿 힐 + 타르시어 보호구역 + 로복강 크루즈가 다 포함됩니다.
타르시어(Tarsier)는 보홀 산속에 사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장류 중 하나예요. 손바닥에 올라갈 정도로 작고 눈이 머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야행성 동물이에요. 코렐라(Corella)에 있는 필리핀 타르시어 보호구역(Philippine Tarsier Sanctuary)이 윤리적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여기를 추천합니다. 다른 곳은 타르시어를 만지거나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게 두는데, 타르시어는 스트레스에 매우 약해서 그런 환경에 노출되면 자해를 한다고 해요. 보호구역에서는 거리를 두고 조용히 보는 규칙이 엄격하고, 가이드가 한 마리씩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해 줍니다. 입장료 120페소.
로복강(Loboc River) 크루즈는 호불호가 갈리는 액티비티예요. 강을 따라 1시간 정도 천천히 떠내려가는 동안 점심 뷔페가 나오고 중간에 현지 마을 사람들이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는 구성. 1인 600~750페소. "관광객 패키지 같다"는 평이 분명히 있긴 한데, 저는 점심 한 끼 강 위에서 천천히 보내는 시간으로는 가성비가 나쁘지 않았어요. 강 양쪽이 야자수와 정글이라 어느 각도로 봐도 풍경이 깊습니다.
다이빙·스노클링이 보홀의 또 다른 강점이에요. 발리카삭(Balicasag) 섬은 알로나 비치에서 방카(Bangka, 필리핀 전통 보트)로 30분 거리에 있는 다이빙 명소인데, 산호 보존 상태가 필리핀 내에서도 손꼽혀요. 거북이를 만나는 게 거의 보장되는 포인트라 다이빙 자격증이 없어도 스노클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반나절 투어 1,500~2,000페소. 여기 거북이는 사람을 별로 의식하지 않아서 1m 거리에서 함께 헤엄칠 수 있어요. 저는 평생 본 바다 풍경 중에서 이 30분이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날씨는 12~5월이 건기, 6~11월이 우기예요. 가장 좋은 시기는 1~4월. 우기에도 종일 비가 오는 건 아니지만, 다이빙 보트가 파도 때문에 출항 취소되는 일이 잦습니다. 8~10월은 태풍 직격 가능성이 있으니 피하는 게 안전해요. 저는 2월에 갔는데 5일 내내 화창했고, 같은 시기에 한국이 영하 5도였던 걸 생각하면 체감 만족도가 더 높았습니다.
옷차림은 가벼운 면 티셔츠, 반바지, 슬리퍼면 99% 끝입니다. 다만 모기 대비는 필수예요. 보홀은 시골 지역이라 해 진 후 식당 야외 자리에 앉으면 모기가 정말 많아요. 한국에서 캠핑용 강력 모기 기피제(이카리딘 20% 이상)를 챙겨가시고, 디기열 예방 차원에서 긴팔 셔츠 한 장은 저녁용으로 가방에 넣어두세요. 자외선은 한국 한여름의 두 배 수준이라 SPF 50+ 선크림은 4~5시간마다 다시 발라야 합니다. 산호 보호 차원에서 "리프 세이프(Reef Safe)" 표기가 있는 선크림을 쓰는 게 매너예요. 일반 선크림 성분(옥시벤존, 옥티노세이트)이 산호를 죽인다는 게 알려진 후로 필리핀 일부 보호구역에서는 일반 선크림 사용을 금지하기도 합니다.
페소 환전은 한국에서 100% 환전하고 가지 마세요. 한국 환율이 좋지 않아요. 마닐라나 세부 공항에서 50% 정도 환전하고, 나머지는 시내의 환전소(Czarina나 Sanry's 같은 체인)에서 바꾸는 게 가장 유리합니다. 보홀 시내에는 환전소 선택지가 적으니 세부에서 미리 충분히 환전해두시는 걸 권해요. 카드 결제는 큰 리조트와 식당에서만 되고, 트라이시클·시골 식당·재래시장은 모두 현금입니다.
3박 4일 동선을 정리하면, 첫날은 세부에서 페리로 도착해 알로나 비치 체크인 + 일몰 + 해산물 저녁. 둘째 날은 풀데이 투어로 초콜릿 힐 + 타르시어 + 로복강 크루즈. 셋째 날은 발리카삭 다이빙·스노클링과 알로나에서 휴식. 넷째 날 아침에 페리로 세부 복귀. 이 구성이 보홀의 핵심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여유도 있어요. 4박 이상이면 팡라오 남쪽의 두마루안(Dumaluan) 비치나 동쪽의 아닐레오(Anilao) 같은 한산한 비치 마을을 하루 더 추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보홀 사람들은 정말 친절합니다. 영어 소통이 거의 다 되고, 트라이시클 기사부터 식당 직원까지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요. 저는 보홀에서 다섯 명에게 길을 물었는데 한 명은 직접 데려다줬고, 한 명은 근처 가게에 부탁해 그 가게 사람이 다시 안내했습니다. 이 동네의 진짜 매력은 결국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 필리핀 여행도 보홀로 한 번 더 가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