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하면 다들 라벤더를 떠올리는데, 라벤더 개화는 6월 말~7월이에요. 5월에 가면 라벤더는 아직 초록색 줄기고, 대신 양귀비(코클리코) 들판이 온 동네를 빨갛게 물들입니다. 저는 사실 이 쪽이 더 좋았어요. 라벤더 철엔 관광버스가 줄지어 오는데, 5월 양귀비 들판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뤼베롱 언덕 너머로 빨간 카펫이 깔린 풍경 앞에 서 보면 왜 세잔과 반 고흐가 이 땅을 떠나질 못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마르세유로 들어가 아비뇽으로 북상하는 동선이 기본이지만, 저는 두 번째부터 니스 인아웃을 택했습니다. 니스는 저가항공 노선이 많고 렌터카 공항 픽업이 편해요. 니스에서 서쪽으로 차를 몰고 엑상프로방스까지 2시간 반, 거기서 뤼베롱 산악 마을 순회로 4~5일이 제 표준 코스입니다. 프로방스는 기차만으로는 절대 맛을 못 봐요. 무조건 차를 빌리세요. 국제운전면허증 챙기시고, 수동 기어가 기본이라 오토매틱을 원하면 예약 시 꼭 명시해야 합니다.
뤼베롱의 산악 마을 중에서 저는 고르드(Gordes), 루시옹(Roussillon), 본(Bonnieux) 세 곳을 꼽습니다. 고르드는 절벽 위에 돌집들이 겹겹이 쌓인 요새 마을인데, 마을에서 3km 떨어진 세낭크 수도원(Abbaye de Sénanque)이 엽서 사진의 주인공이에요. 12세기 시토회 수도원 앞으로 라벤더 밭이 펼쳐지는 구도. 5월엔 라벤더 대신 초록 밭이지만 수도원 건물 자체가 경외감이 있습니다. 루시옹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데, 마을 전체가 주황색과 붉은색이에요. 주변 땅이 적토(오커) 광산이어서 집 외벽 색이 전부 흙에서 왔습니다.
본(Bonnieux)은 덜 유명하지만 저는 여기서 가장 좋은 저녁을 먹었어요. 마을 꼭대기 Le Fournil이라는 동굴 식당에서 프로방스 스타일 양고기를 먹었는데, 양고기에 로즈마리와 타임이 통째로 배어 있어서 한 입 씹을 때마다 이 땅의 허브 향이 훅 올라왔습니다. 예약 필수고 성수기엔 2주 전엔 연락하세요.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는 세잔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도시 자체가 그냥 살기 좋아 보이는 도시라 저는 하루 묵었어요. 미라보 거리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 카페에 앉아 로제 와인을 한 잔 마시는 것만으로 반나절이 갑니다. 세잔 아틀리에는 외곽에 있는데 실제 그가 말년에 그림 그리던 스튜디오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림 도구, 안 씻은 사과 모형, 외투 하나까지. "정물화"의 원본 재료가 눈앞에 있는 순간의 감각은 특별합니다.
아비뇽은 교황청이 한때 로마에서 옮겨왔던 곳이라 구도시가 통째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교황궁 내부는 빈 방이 많아 호불호가 갈리지만, 옥상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론 강과 "Pont d'Avignon" 노래로 유명한 절반 끊어진 다리의 실루엣은 기억에 남습니다. 근처 샤토뇌프뒤파프(Châteauneuf-du-Pape) 와이너리를 하루 묶으시면 프로방스 남부 레드의 진수를 맛볼 수 있어요.
먹는 얘기. 부야베스는 마르세유, 라타투이는 니스 쪽이 본고장이지만 프로방스 내륙에선 타프나드(올리브+앤초비 페이스트)와 소카(병아리콩 팬케이크)가 더 일상 음식입니다. 시장에 가면 염소치즈 파는 노점이 줄 서 있는데, 프로방스 염소치즈는 허브에 굴린 형태가 많아서 와인 안주로 완벽합니다. 저는 매번 작은 로그 치즈 하나씩 사서 숙소 테라스에서 혼자 와인이랑 먹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어요.
한 가지 주의. 프로방스 렌터카는 주차가 생각보다 골치 아픕니다. 산악 마을 중심은 차 진입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마을 입구 유료 주차장에 대고 걸어 올라가야 해요. 작은 마을일수록 이게 당연합니다. 하이힐이나 굽 있는 신발은 금물, 발목 잡히는 돌길이 기본이에요.